"야구장은 3시간짜리 거대한 노래방" 2030 여성팬이 이끄는 새 야구 문화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7 조회
- 목록
본문
[허지원 기자]
KBO 리그가 올해 9월, 누적 관중 1200만 명을 돌파했다.이 기록은 팬덤의 지형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KBO 공식 통계에 따르면 전체 온라인 예매자의 57.5%는 여성이었다. 20대 남녀중 여성의 예매 비율은 63.6%, 30대의 경우 여성이 56.9%를 차지했다. 코로나19 이후 SNS와 숏폼 콘텐츠를 통해 야구를 즐기기 시작한 젊은 여성팬들이 늘어나면서 야구장은 세대와 성별을 아우르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정연(경기도 군포 거주, 만 25세)씨는 야구 입문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중계까지 챙겨보기 시작했지만 하필 삼성이 8연패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계속 질 수가 있지?" 하는 오기가 생겨, 이길 때까지 본다는 마음으로 야구를 계속 봤다고. 김씨는 "그러다 연패가 깨지는 순간이 너무 짜릿해서 팬이 됐어요. 친구랑 직관을 다니고 룰을 하나씩 배우는 것도 오타쿠 기질이 있는 저한테는 또 다른 재미였고요. 결국 2024년 10월에는 유니폼에 이재현 선수 이름까지 마킹했어요. 그때야 진짜 삼성팬이 된 것 같았죠"라며 야구 입덕 계기를 설명했다.
재작년 친구와 함께 야구장을 처음 찾으면서 야구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밝힌 황세림(서울 거주, 만 26세)씨.
"날짜도 정확히 기억나요. 2023년 5월 24일, 잠실 경기장에서 삼성과 두산전을 봤는데 두산이 져서 팬이었던 저와 친구 둘 다 무척 화를 냈었죠. 패배한 경기였지만 당시 현장의 응원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친구와 직관한 경험을 계기로 야구에 푹 빠졌다고 밝힌 그는, 이후 친구들을 직접 야구장으로 데려가는 데 앞섰다. "지금까지 친구 7명을 야구팬으로 만들었어요. 일단 한 명을 테이블석으로 데려가서 맛있는 걸 나눠먹으면서 응원하고, 그 인증샷을 또 SNS에 올리니까 다른 친구들도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두산이 괜히 '먹산'이겠어요? 갈비튀김이랑 떡볶이로 꼬시니까 다 저절로 팬이 됐어요."
이처럼 2030 여성팬들은 기존의 팬들과는 조금 다른 유입 경로를 보여준다. 이들은 SNS에 업로드 된 경기 하이라이트, 선수 인터뷰, 응원 퍼포먼스 등 숏폼 영상이나 '밈'화된 콘텐츠를 통해 야구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간다. 특히 지인과 연결된 피드를 통해 관련된 내용을 보다 쉽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접한다. 이러한 SNS 기반의 관심은 단순한 정보 습득으로만 그치지 않고, 친구나 지인과 함께 직관하는 실제 경험으로 이어진다.
야구장은 이제 여럿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그저 스포츠를 관람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야구장이 선사하는 각종 콘텐츠-응원, 먹거리, 굿즈-까지 함께 즐기는 체험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야구장은 3시간짜리 거대한 노래방이에요"라고 밝힌 이나연(경기도 고양 거주, 만 24세)씨. "콘서트장 못지 않은 현장감과 응원의 열기가 있어요. 지고 있다가도 역전 홈런이 주는 짜릿한 도파민이라든가, 먹고 노래하는 분위기가 있어 최고의 놀이터예요." 부모님이 기아의 팬이었다고 밝힌 나연씨는 처음엔 야구팬이 아니었다고 한다.

2025년 KBO 리그 TV 및 OTT(TVING 등) 플랫폼 시청자 분석에서도 20~30대 여성 팬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2025시즌 티빙 개막전 시청자 중 25~29세 여성 이용자가 10%, 20대 여성 전체가 약 20%로 집계됐다. 게다가 2030여성팬들의 야구 문화는 경기장 안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온라인 커뮤니티, SNS를 통해 집단적 팬덤 문화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경기 사진이나 영상, 응원곡의 편집버전, 구매한 굿즈 등을 직접 SNS에 업로드하며 서로 교류하고, 야구장 바깥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최근 팬덤은 유니폼, 굿즈, 다양한 협업 상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하며 소비 시장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KIA의 경우, 팀의 인기스타인 김도영 선수의 유니폼 매출만 무려 100억 원이 넘었다고 밝힌 바 있다. 2030 여성팬들은 또래 집단과의 연결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로 팬 경험을 나누며 유대감을 쌓고 특정 팬덤을 강화시키는 분위기에 대해 일부에서는 아이돌 팬덤 문화의 잘못된 이식이라는 평가도 존재하지만 스타를 향한 열정과 그들의 드라마에 몰입하는 태도는 기존 야구팬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특정 선수에 대한 관심으로 야구에 입문한 뒤 점차 팀 전체,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영역을 확대해나가며 응원과 소비, 콘텐츠 창출에서 새로운 활력과 다양성을 주도하는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변화는 야구 응원 방식의 전환, 관람 편의시설 확충, SNS 기반 소통의 활성화 등 야구장 자체를 공동체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는 팬덤의 주도권이 어디를 향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훨씬 더 큰 공동체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문화의 장으로 야구장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평소라면 어색할 택시 기사님과도 야구 이야기를 하면 금세 친구처럼 가까워진다는 김정연씨.
"야구팬에게는 세대도 성별도 중요하지 않아요. 응원하는 팀이 달라도 서로 관심을 가지고 챙겨줘요. 경기도 사람이 삼성을 응원하다보니 가 볼일 없던 대구에도 갔어요. 유니폼만 보고 말을 거는 분도 계셨어요. 덕분에 지역 구장 원정도 즐길거리가 됐어요. 친구과 내년엔 전국 구장을 다 가보자는 얘기도 했어요.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경험을 야구 덕에 해보는 거죠."
세림씨 역시 야구를 매개로 새로운 인연과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말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직장 상사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어요. 둘 다 야구팬이었거든요." 유니폼을 입고 밖을 다닐 때면 말을 거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고. "부산 지하철에서는 제가 입은 두산 유니폼만 보고 야구 얘기를 자연스레 하셨던 할아버지도 계셨어요. 맛집을 추천해주시거나 제가 몰랐던 선수들의 비하인드를 들려주시더라고요." 세림씨는 야구 시즌이 끝나고 찾아간 팬미팅에서도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9살인 아이가 혼자 티켓팅에 성공한 거예요. 그 부모님이 동반자를 구하길래 제가 자원했죠. 그날 하루 동안 같이 야구 얘기도 하고 철웅이(두산 마스코트)가 나오는 인생네컷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이런 신뢰가 야구팬들 사이엔 있어요."
야구장에서의 연결은 그 밖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에 속한 셈이다. 세대를 막론하고 각자 자신의 팀이나 선수의 경기를 응원하면서 개인적 일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이처럼 팬들을 긴밀하게 엮어주는 근원은 무엇일까. 야구는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꼴찌팀이 1위팀을 꺾는 일이 그리 큰 이변이 아니다. 연장전의 역전이나 무명 선수가 만들어 낸 결정적인 한 방이 주는 감동은 야구의 수많은 변수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변수 위에 있는 예측불가능한 긴장감과 드라마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 감동을 함께 공유한다.
황세림씨는 "경기장에 앉으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 같은 기원을 품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팀워크와 열정은 선수에게만 있는 게 아니에요. 관객 모두가 공유하죠"라고 밝혔다. 최근 은퇴한 김재호 선수의 은퇴식에서, "유니폼을 후배 신인에게 입혀주고 마운드를 내려올 때, 유격수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입맞춤을 하는 선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코믹한 응원가를 따라부르며 주변 팬들도 다들 같이 울었어요." 그는 야구에는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야구에 스며들게 돼요. 심지어 비시즌에는 구단 훈련 영상을 보거나 다음 시즌을 예측하며 시간을 보내요."
"야구는 일주일에 6번이나 경기를 치루는데 오늘 진다고 끝이 아니에요. 내일이 또 오죠. 1위와 10위가 겨뤄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게 특별해요"라고 야구의 매력을 밝힌 김정연씨. 그는 20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선수, 늦게 빛을 발하는 베테랑, 예기치 않게 무너지는 스타의 모습 등 경기장에는 각자의 특별한 스토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힘들 때 선수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해요. 또 하루 살아갈 힘을 얻는 거죠."
공감과 연결의 광장, 야구장이 일으키는 변화
야구장은 이제 단순한 경기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각기 다른 세대와 성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소통하고 연결되는 현대적 '광장'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팬들은 팀이나 선수를 응원하며 같은 경험을 공유할 뿐 아니라, 처음 만난 타인과도 평범하게 관계를 맺으며 야구팬이라는 정체성이 주는 새로운 소속감을 체험한다. 야구장은 이제 일상의 배경이 되고, 관계의 기억이 되는 사회적 장소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는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public sphere)' 이론을 빌려 설명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 등 주요 저작에서, 공론장을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개인들이 자유롭게 모여 사회적 쟁점과 공적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공간"으로 정의했다. 즉, 계층이나 신분, 이념을 넘어 대화와 문제 해결이 일어나는 사회적 기반이 진정한 공론장이라 본다.
핵심은 '의사소통적 합리성' 원칙에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강요가 아닌 상호 이해와 합의를 통해 사회가 확대되고 정당성을 얻는다. 오늘날 야구장은 다양한 세대와 성별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콘텐츠에 집중하며, 현장과 온라인 모두 감동을 공유하는 '현대적 공론장'의 예시로 자리잡았다. 야구장이 공동체 경험을 촉진하고 민주적 소통의 훈련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양한 관객이 섞여 함께 야구를 경험하고, 같은 드라마를 각자의 언어와 기억으로 다시 쓰고 있다. 야구장은 이제 취미의 공간을 넘어 공동체 경험과 만남의 장이 되었다. 구단들도 이에 맞춰 어린이 시즌권이나 가족 단위 패키지와 같은 아동 친화적 정책과 누구나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응원 공간 확보, 팬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를 늘려가는 추세다.
롯데 자이언츠는 14세 미만 어린이 회원을 위한 '키즈클럽'을 운영하며, 전 구장 외야 무료입장, 유니폼·모자 패키지, 홈경기 시구·시타 체험 등 다채로운 가족 체험 행사를 제공하고 있다. SSG 랜더스는 '레이디스 데이'를 열어 여성 관객에게 특별 할인, 포토타임, 선수 인터뷰 행사, 여성 전용 굿즈 등 맞춤형 혜택을 마련했다. 롯데·SSG 등은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현장 매표 창구 운영, 예매 안내 서비스, 전용 좌석 확보 등 고령 관객이 티켓을 쉽게 구입하고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처럼 각 구단의 세심한 관객 정책과 현장 서비스는 야구장이 세대를 아우르고, 모두의 취향과 필요를 존중하는 열린 커뮤니티로 진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야구장은 스포츠를 넘어 다양한 삶이 교차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소통과 연대의 광장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이 완전히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이라고 말하긴 여전히 어렵다. "치어리더 옷이 너무 과하게 벗겨지거나, 배트걸은 꼭 반바지 착용에 예쁜 여성으로 내세우는 게 당연하게 여겨져요. 어린 팬들도 많은데, 이런 부분은 분명히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 나연씨는 심판진 구성과 팬문화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라 지적했다. "마케팅이나 현장 운영이 더 포용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어린 아이들이나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야구장에 더 많아졌으면 해요."
디지털 접근성 이슈 역시 야구장이 넘어야 할 과제다. 온라인 예매와 모바일 중심의 관람 시스템은 일견 편리하지만, 디지털 취약계층이나 장애인에게는 여전히 높은 장벽이 된다. 최근에는 일부 구단이 장애인석을 일반석으로 둔갑시켜 판매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이런 사건은 단순한 운영 미비가 아닌, 야구장이 '열린 공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완전히 평등하고 포용적인 광장이 되기까지는 아직 과제가 남아있다. 일부 팀의 치어리더 노출 문제나 남성 중심의 특정 응원문화는 모두가 편하게 즐기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KBO 팬덤의 성별·세대 변화가 더욱 뚜렷해질수록, 구단과 리그의 공동체 운영 방식도 그에 맞춰 유연하고 포용적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가 강조한 '공적 논의와 만남의 장'으로, 모두가 스스럼없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공유장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누구나 자유롭게 소통하고 주체적으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야구장이 이러한 광장의 역할을 실천해낼 때 한국 야구는 단순한 흥행을 넘어 사회적 다양성과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스포츠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블로그에도 실립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