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 전 야구해설위원 별세, 향년 57세 '불의를 참지 못했던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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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OB 모임인 사단법인 일구회는 12일 고(故) 이병훈 전 해설위원의 부고를 알렸다.
이병훈 전 위원은 대방초등학교와 선린중학교, 선린상업고등학교(현 선린인터넷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선린상고 시절에는 투수로도 활약했으며, 고려대에 입학한 뒤에는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고인은 고려대를 졸업한 뒤 1990년 MBC 청룡의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했다. 팀이 지명 후 LG 트윈스로 바뀐 가운데, 고인은 입단 첫해인 1990시즌 72경기에 출장, 타율 0.258(120타수 31안타), 1홈런 19타점 15득점 3도루, 11볼넷, 15삼진, 장타율 0.317, 출루율 0.318로 활약했다. 고인의 활약과 함께 LG는 그해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고인은 이듬해인 1991년 42경기에 출장해 타율 0.219(96타수 21안타) 2홈런 14타점 9득점 7볼넷 13삼진 장타율 0.365 출루율 0.269의 성적을 올렸다.
고인이 최고의 활약을 보낸 건 1992시즌이었다. 그해 92경기를 뛴 고인은 타율 0.300(263타수 79안타) 16홈런, 45타점 34득점 20볼넷 38삼진 장타율 0.521, 출루율 0.353의 성적을 찍으며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어 1993시즌에는 109경기를 뛰면서 타율 0.256(281타수 72안타) 6홈런 23타점 19득점 15볼넷 42삼진 장타율 0.349 출루율 0.298의 성적을 올렸다.
1994시즌을 앞두고 큰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LG가 김상훈과 이병훈을 KIA로 보내는 대신, KIA로부터 한대화와 신동수, 허문회, 김봉재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1994년 고인은 해태에서 타율 0.279(330타수 92안타)로 커리어 최다 안타 기록과 함께 8홈런 41타점 38득점 19볼넷 28삼진 장타율 0.373 출루율 0.317의 성적을 거뒀다. 다만 1995시즌 출장 경기 수가 32경기로 크게 줄어들었고, 1996시즌 도중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그해가 고인의 마지막 현역 시즌이었고, 그렇게 유니폼을 벗었다.
고인은 현역 시절부터 유쾌한 말솜씨와 재치 있는 입담을 자랑했다. 은퇴한 뒤 마이크를 잡은 고인은 해설위원과 방송인으로 활약하며 많은 야구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1년부터 SBS 라디오에서 야구 해설위원을 시작한 고인은 TBS 야구 해설위원, 원음 방송 라디오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2006년부터 KBS N 스포츠의 간판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나이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했다. 2012년에는 5월 21일 새벽 성추행범을 쫓아간 뒤 격투 끝에 제압하며 경찰로부터 용감한 시민상을 받았다. 당시 고인은 서울 관악구 낙성대동 한 놀이터에서 아들과 야구 스윙 연습을 하다 인근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고, 범인을 끝까지 추격한 뒤 격투 끝에 성추행범을 잡은 뒤 경찰에 넘겼다.
고인의 둘째 아들인 이강호(개명 전 이용하)는 2014년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의 지명을 받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수원 성 빈센트 병원 장례식장 5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4일 오전 5시, 장지는 화성 함백산 추모공원이다.
김우종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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